티스토리 뷰

주식경제이야기

1845년 철도버블

미우트리 2023. 10. 15. 20:43

버블의 서막은 운하투기, 1767년 맨체스터 북서부에 위치한 워슬리의 광산에서, 방직공장 단지가 들어선 맨체스터 남서부의 런콘을 잇는 45킬로미터짜리 듀크 브리지워터 운하가 건설되었다. 마침내 영국에서 운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20년 동안 영국에서는 1,500킬로미터가 넘는 운하가 건설되었고, 운하건설회사들의 주가는 하늘을 쳤다. 브리지워터 운하는 투자자들에게 대규모의 자본이득과 배당수익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운하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은 당시 사람들을 흥분시킨 빅뉴스가 되었다. 석탄가 공산품, 농산물의 물류비용을 크게 낮추는등 운하로 인해 얻게 되는 이익이 너무나 커, 당시 사람들은 운하가 기존질서를 해체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운하의 개통으로 새로운 시장이 열리자 상품값은 하락하고, 운하인근 땅값은 상승했다. 사정이 이쯤 되면 투기가 발생하는게 당연한 법, 1790년대 초반 마침내 운하투기의 막이 올랐다. 1792년 운하투기는 절정에 달했다. 대부분의 운하건설이 이뤄졌던 미들랜드에서 당시 발행된 신문들의 지면은 주식브로커의 광고와 주주들의 미팅소식, 투기꾼들이 제시한 운하회사의 주가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모든 투기에는 종말이 있는 법, 1793년 운하투기는 프랑스의 혁명전쟁이 상업공황으로 이어지면서 파국을 맞게 되었다. 운하회사의 주가가 폭락했고 신설 운하의 투자수익도 비참할 정도로 떨어졌다. 세기가 바뀌어 19세기에 접어들자 운하회사의 자본수익률은 투기발생 이전 평균수익률인 50%에서 턱없이 떨어져 5%대까지 주저앉았다. 심지어 25년 뒤인 1825년에는 배당금을 지급하지 못한 운하회사가 5개 가운데 하나꼴이 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리고 전체 운하회사의 평균배당률도 정부채권 수익률과 비슷한 수준이 돼버렸다.

 

철도버블은 1840년대 초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당시 영국은 산업 혁명의 중심지로, 철도는 물류와 교통 분야에서 혁명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철도가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철도회사 주식에 투자하고자 했습니다. 철도는 미래에 이루어질 산업 혁명과 국토 개발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투자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어했습니다.

이 현상은 많은 사람들이 과도하게 철도 회사 주식을 매수하고자 했고, 주가는 급상승했습니다. 이로 인해 철도 회사들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새로운 주식을 발행하고, 주식을 발행하는 기업들은 저평가된 자산을 대비보다 비쌀 가격으로 팔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주식을 빚으로 구입하는 마진 투자로 투기를 더욱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식시장은 과열되었고, 현실적인 기대에 비해 주가가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주식을 보유한 사람들은 주가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조작과 거래를 시도했으며, 심지어 주가 조작과 소문을 통한 가격 조작이 빈발했습니다.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실제 기업 가치와 무관하게 부풀려졌으며, 투자자들의 관심은 단기 수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철도버블은 1845년과 1846년에 고점을 찍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몇 년 동안 주식 가격은 빠르게 하락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투자자가 큰 손실을 입었고, 실제로 파산하거나 파산 위기에 직면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부와 금융 규제 당국은 이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행동하고, 주식 거래와 투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철도버블의 진정을 도왔고, 이후 시장 안정성을 회복하도록 도왔습니다.

철도버블은 당시 경제와 금융 시장에서 발생한 큰 이슈 중 하나로, 이후의 금융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향후 금융 시장에서 투기 현상을 억제하고 시장 안정성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을 제공했습니다. 이것은 주식시장에서 열리는 진풍경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시각과 조심스러운 투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키는 사례로 남았습니다.

반응형